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제국(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문단 편집) === '''동학''' === 이형의 즉위 이후, 계속되는 승전과 개혁으로 적어도 굶어 죽을 걱정은 사라지고 학정을 벌이던 탐관오리들이 숙청되면서 한동안 크게 교세를 잃었다. 또한 기독교의 공인과 확산으로 외국과 연줄이 있는 교회들의 확장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2대 교주 최시형은 한울교로 개칭하고 교단에서 종교적 색채를 줄이고, 현실참여를 위해 삼청 원칙[* 황제의, 국제사회의, 민중의 말을 들으라는 내용. 제일 먼저 나오는 게 황제다.]을 내세우며 국민들의 공감을 얻는 시민단체가 되었다. 이에 신흥 자본가들과 동학이 역적 혐의로 숙청된 일을 기억하는 관료와 의원들이 동학 처벌안을 의회에 제출했지만, 이형이 3번이나 거부하면서 동학은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신하들과 유학자들은 저 개망나니 황제가 이제는 세 번이나 말을 듣고 말로 답할 만큼 점잖아졌다고 감동하면서,[* 폭군이라는 것에 걸맞게 고종은 유학자들이고 신하들이고 하는 말을 그동안 잘 안 들어먹었다. 물론 고종 입장에서도 당연하지만... 물론 그럼에도 아무도 반발을 못한건 당연하겠지만 고종 1인의 능력으로 저 엄청난 업적을 세워놔 도저히 반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다. 그러니 말도 안 들어먹는 황제에 대해 속으로만 꿍시렁거릴 찰나에 고종이 세 번이나 점잖게 들어준다는 것에 감동하지 않을리가 없다.] '''행정적인 방법으로 동학을 탄압했다.''' --감동은 감동이고 역적은 역적이고-- 괜히 체포해서 구속 가능한 한도까지 가둬놓는다거나, 이리저리 허가를 안 내준다거나... 정치참여가 정부의 경계를 샀음을 알게 된 동학 수뇌부는 최시형의 비정치 복귀파와 손병희의 적극적 정치참여 분파로 갈라서게 되었다. 손병희의 동학은 프랑스 유학파들 중 사회주의자들을 흡수하고 '''유교 사회주의'''라는 사상을 내세운다. 이들은 모든 재산을 국유화하자는 사유재산 부정론자들까지 끌어안고 '''사회주의'''란 이름을 내걸기 시작한다. 여기까지였다면 말 그대로 정부의 숙청 대상이 이름표를 단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들은 일반 사회주의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사회민주주의|공권력이 경제를 방관하지 말고 적절하게 개입해 빈부격차를 줄여야 한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뿌리부터 사회주의의 성인 마르크스를 숭상하는 유럽 본토 사회주의의 공감대를 얻기 힘든 이 의견은 일본과 달리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형은 사회주의와 공화주의가 제정과는 상극임을 알기에 그들의 정치참여는 금지하지만 복지제도를 정비한다. 현실 역사에서 왕당파인 비스마르크도 사회주의 세력 대두에 대응해 최초의 사회복지를 만들었듯이 혁명에 대응하기 위해 온건 개혁을 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대응 방법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